늘 뜨거웠던 김문수

작성자 라이더
작성일 2025-05-05 05:02 | 3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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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후보는 노동운동가로서나 행정가로서나 현장 에서 뜨거웠던 활동가로 평가됩니다 서울대 재학 시절 사회운동 이력으로 두 번의 제적을 당하고 수차례 고문을 받았습니다 아내 설난영씨는 노동운동 중에 만났습니다 동구권 몰락을 계기로 보수 정치로 전향한 이후로는 여의도 천막 당사 로 당을 일신시켰습니다 이후 경기도지사를 두 번 역임하던 그는 2016년 총선 패배로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2 3 비상계엄 국면에서 꼿꼿문수 로 재등장했습니다

대학 제적 수감 두 번씩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서울 청계천 피복 공장 등을 7년 이상 다니며 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입니다 그는 1970년대 서울대에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제적됐고 1980년대엔 노동운동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옥고도 치렀습니다 민주화 운동 혐의로 투옥됐을 때 고문당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김 후보 부친이 빚보증을 섰다가 잘못돼 10세 때부터 판잣집 단칸방에 살았다고 합니다 밥상 하나에 7남매가 호롱불을 켜고 둘러앉아 공부했다는 김 후보는 대구의 경북중 고를 나왔습니다 고교 3학년 땐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무기정학을 당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는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서울대 재학 중 학생 운동 서클인 후진국 사회 연구회 에서 활동하면서 유신 독재 타도 운동을 했습니다 김 후보는 학회 활동을 하며 목격한 철거민촌 빈민들 모습에 충격받고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국민주학생총연맹 사건 등에 연루돼 1971년과 1974년 대학에서 두 번 제적당했습니다 김 후보는 학교를 떠나 7년 동안 현장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1975년 청계천 피복 공장에 재단 보조로 취직했습니다

처음엔 또또사 일을 했습니다 옷에 똑딱이 단추 구멍을 뚫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재단사에게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며 처음으로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고 말했습니다 김 후보는 그 시절 열관리기능사 등 자격증을 7가지 땄다 이 자격증을 갖고 한일공업 에 보일러공으로 취업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노조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인 노동 운동에 나섰습니다 김 후보는 1980년 2월 반국가 모임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수감됐습니다 1985년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1986년엔 5 3 인천 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2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김 후보는 회고록에서 1986년 수감 당시 족수승 등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이런 비인간적 가혹 행위를 하고 또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며 머리를 마룻바닥에 찧어 죽어버리려고 하니 검도 투구보다 더 둔탁한 투구를 덮어 씌웠다 고 했습니다

김 후보는 1980년대 운동권의 신화 로 통했습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과거 한 TV 프로그램에서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습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 고 했습니다 김 후보와 노동운동을 함께한 한 인사는 그 시절 김문수는 뜨겁게 운동한 혁명가였다 고 했습니다 김 후보가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을 때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여동생 유시주씨가 같이 연행됐고 유 전 이사장 누나인 유시춘 EBS 이사장이 구속자 가족 협의회 총무를 맡아 김 후보 옥바라지와 석방 운동을 주도한 일도 있습니다

김 후보는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은 유 전 이사장과 TV 토론회에서 유 전 이사장에게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온 가족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고 말했습니다 김 후보는 1990년 민중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 진입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소련 등 공산주의 동구권 붕괴를 보고 노선을 보수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습니다

김 후보는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하던 아내 설난영 씨를 만났습니다 5공 신군부가 김 후보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려고 수배령을 내렸을 때 설씨 자취방에 숨어 있으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둘은 1981년 서울 봉천동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김 후보는 우리는 청첩장도 없고 드레스도 없었다 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 주변엔 전투경찰 버스 4대가 대기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가장한 노동자 시위라고 의심한 것입니다

김 후보는 최근 경선 토론회에서 별의 순간 이 언제였느냐는 물음에 어려움 속에서 제 아내를 만난 것 그보다 더 큰 별의 순간이 없었다 고 말했습니다 김문수의 보수정치 시대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1990년대 동구권 붕괴를 계기로 노동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는 노동운동을 제도권 내로 이어가자 며 이재오 전 의원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하나의 의석도 얻지 못하고 해산했습니다

e편한세상 옥정 리더스가든 이후 택시 운전수 일을 하던 김 후보는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국민의힘 전신 인 민주자유당에 전격 입당했습니다 김 후보는 보수 정당 입당 배경에 대해 밖에서 혁명을 계속 꿈꾼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고 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영입한 인재였지만 곧바로 꽃길 을 걸은 것은 아닙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 후보는 당시 야당 텃밭인 경기 부천 소사에 출마했습니다 상대는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이었습니다 당시 김 후보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 는 자서전을 펴내자 박 의원은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라는 저격용 책을 냈습니다 이 일로 고소전까지 벌어지면서 부천 소사의 넥타이 전쟁 은 전국적 화제를 불러모았습니다

김 후보는 1 94 포인트 격차의 신승을 거뒀고 이후 부천 소사에서 내리 3선을 했습니다 울산 온양발리 신일해피트리 더루츠

김 후보의 또 다른 정치 변곡점은 소속당 이 차떼기당 꼬리표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으로 위기에 몰렸던 2004년 17대 총선 때다 김 후보는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죽을 각오로 한나라당을 대청소하겠다 고 했습니다 실제 김 후보는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등 중진 37명을 불출마시켰고 강남 출마가 거론됐던 홍사덕 원내 총무는 경기 고양 일산갑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쳤습니다 궤멸 위기를 딛고 121석을 얻은 당시 김문수 공천 은 지금도 공천 개혁의 성공 사례로 거론됩니다

김 후보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데 이어 2010년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경기도지사 재직 시절 추진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 기획 수도권 통합 요금제 광교 판교 다산신도시 개발 삼성반도체 평택캠퍼스 유치는 김 후보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힙니다 반면 2011년 소방서에 전화해서 소방관에게 거듭 관등성명 을 요구했던 녹음 파일이 공개된 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김 후보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론을 형성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밀렸습니다 김 후보가 선출직 휴지기 에 들어간 것은 2016년 20대 총선부터였습니다 당에서는 험지 에 출마해달라 는 요구가 있었다 김 후보는 대구 수성갑 출마를 강행했습니다 대구 수성갑에서 김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맞붙어 24

6 포인트 격차로 크게 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당내 김 후보의 정치적 위상은 하락했습니다 이후 김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 속에서 치러진 20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박원순 전 시장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듬해인 2019년 김 후보는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기독자유통일당을 창당하면서 아스팔트 보수 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김 후보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대통령 소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발탁됐습니다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출석한 국정감사에서 김 후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일성주의자 라고 발언하면서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보수 진영 내에서 김 후보의 선명성이 부각됐고 지난해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정치권에선 김문수가 12 3 비상계엄 국면에서 정치 무대에 다시 올랐다 는 평가가 많다 비상계엄 선포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는 계엄 해제 후 국회 긴급 현안 질문 때 민주당 서영교 의원의 국무위원 단체 사과 요구를 홀로 거부했습니다 당시 김 후보만이 자리에 앉아 있던 장면이 회자되면서 지지층 사이에선 꼿꼿문수 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전까지 대선 주자 후보군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김 후보는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범보수 주자 최상위권에 줄곧 이름을 올렸고 결국 국민의힘 대선 후보직을 거머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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